[중앙시평] `버지니아텍`을 넘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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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버지니아텍`을 넘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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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말고는 총기 범죄를 막을 근본대책이 없는 미국은 역사학자 홉스태터의 말처럼 총기문화의 나라다. 탈출구 없는 범인의 정신세계가 제도적 허점을 틈타 폭발한 버지니아공대 사건도 총기사회의 한 단면이며, 전형적인 미국 국내 사건이다. 이 사건을 한국 국민이 미국에서 총을 난사한 국제적 사건으로 오인한 것은 오히려 한국 정부와 언론이었다. 미국 사람 하인스 워드까지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둔갑시키는 혈통주의와 죄 없는 옆 사람의 책임을 더 가혹하게 묻는 단체기합의 문화가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혈통민족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인이 미국의 총기 사고에 집단적 애도를 표하고 사과하는 한국 정부와 언론이 고맙기보다 차라리 낯선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죽하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가 범인을 그렇게 키운 미국이야말로 한국에 사과할 일이라며 "한국이여 그만 사과해 달라"는 사설까지 썼겠는가.

다만 미국에 사는 교민들의 심적 부담은 조금 다른 문제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상처받은 한인사회의 자긍심을 치유할 근본책은 시간이 아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연방헌법이 개정돼 총기 소지가 금지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다. 마흔세 명의 대통령 중 네 명이나 총탄에 쓰러진 미국이지만 총기 소유를 금하는 '원포인트 개헌'은 엄두도 못 낸다.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미국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새로 탄생할 연방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가장 우려했다. 그 해결책이 민병제였다. 시민과 군대를 따로 분리하지 말고 시민 스스로 무기를 든 민병이 되면 국가가 부당한 억압을 가할 때 저항할 수 있다는 로마 역사의 지혜를 끌어온 것이다. 시민의 총기 소지를 보장한 미 연방헌법 수정 제2조의 역사적 배경은 이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총은 황야의 결투나 냉혹한 도시범죄를 상징하는 문화적 표상이 아니다. 비록 자유보다 범죄를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헌법상 미국의 총은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맞서는 자유와 저항의 표상이다.

총기 규제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켜온 전미총기협회(NRA)가 보검처럼 휘두르는 명분도 바로 이 자유다. 희생자 통계를 들먹이는 규제론자의 '실용주의'는 씨도 안 먹힌다. 샌프란시스코는 시내에서 총기를 규제하는 법을 주민투표로 통과시켰지만 NRA의 무효소송에 휘말려 곧 철회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뉴올리언스 경찰은 사고 예방을 위해 주민들의 총기를 압수했지만 NRA가 소송을 제기했고, 비상사태 하에서도 총기를 압수하지 못한다는 루이지애나 주법이 제정됐다. 뒤이어 연방의회는 연방정부 이하 모든 지방정부가 비상사태 하에서도 합법적 무기는 압수할 수 없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 총기 규제를 외치며 NRA와 맞붙은 정치인 대다수가 이 단체의 공세 때문에 낙선하거나 정치를 접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총기 규제론자인 민주당의 앨 고어는 NRA의 집중포화에 안방인 테네시와 아칸소를 잃으면서 부시에게 패배했다.

1920년부터 13년간 금주 헌법까지 시행한 바 있는 미국이지만 총기 규제만은 이토록 어렵다. 그런 만큼 이번 사건은 재미 한인이 미국의 가장 어려운 숙제를 자신의 숙제로 끌어안을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이 총기 문제에 대한 한인사회의 입장을 집약하고 표명할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으로 총기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표명할 필요성과 명분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인의 가족을 비롯한 교민사회 또한 이번 총기 사건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모금이나 단식 같은 소극적 감상주의는 정공법이 아니다. 차라리 승산은 희박하더라도 총기 규제 단체들과 연대해 총기 문제의 정치적 쟁점화에 동참하는 것이 미국식 정공법이다. 미국은 멀지만 재미 교민사회가 '버지니아의 충격'을 치유할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권용립 경성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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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Source: Joins.com/JoongAng Daily
<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02&Total_ID=2707229">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02&Total_ID=2707229</a>

Creator

Yong-Rip Gwon

Date

2007-10-19

Contributor

Haeyong Chung

Language

ko

Citation

Yong-Rip Gwon, “[중앙시평] `버지니아텍`을 넘으려면,” The April 16 Archive, accessed November 21, 2024, https://april16archive.org/items/show/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