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분석한 ‘버지니아 비극과 조승희’

Title

정신과 의사가 분석한 ‘버지니아 비극과 조승희’

Description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사건의 결과는 너무도 자명한 데 반해 전개 과정은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연결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더 모호한 것은 범인으로 밝혀진 조승희씨의 범행 동기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었기에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것일까?

죽은 이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밝혀진 그의 행적과 그가 남긴 단서들을 통해 누가 어떤 추측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추론일 뿐이다. 그 성근 추론들 사이를 메우는 진실이라는 것은 결국 아무도 모르는 일일 가능성이 많다. 단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겪었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조금 일반화해 봄으로써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조승희가 출현할 가능성을 줄이려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고작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몇 가지 키워드로 그를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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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에 의하면 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범행 사이의 두 시간 동안 NBC 방송국에 자신의 '선언'을 담은 비디오를 만들어 보냈다. 그가 비디오에서 보여준 것은 굳은 표정, 격앙되어 있지만 어조의 변화가 없는 목소리, "가진 자들"이란 말로 짐작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적개심과 거의 망상에 가까운 수준의 피해사고, 예수가 자신을 박해했다거나 머릿속에 암을 집어넣었다는 다소 기괴한 내용의 이야기들,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사고(思考)의 흐름, 그리고 뭔가 공감하기 힘든 정서 등이었다.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비디오에 나타난 모습을 보면, 그의 정신에는 심각한 균형의 상실, 즉 일종의 정신병적 상태가 나타났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 비디오를 보는 일반인이 '정신병은 폭력적이고 위험하다'는 오해를 갖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될 정도로 그의 상태는 혼란스러워 보인다.

물론 정신병은 심리적 질환이 아니라 뇌의 질환임이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의 뇌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행동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균형을 이루어 작동하지 못하면 정신병이 생긴다. 어떤 시스템에 고장이 일어났느냐에 따라 정신병의 종류가 나뉜다. 하지만 조승희씨의 경우, 뇌신경 시스템이 오랜 시간 신경세포에 가해진 부하(負荷)를 이기지 못하고 탈선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비디오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뭔가 좀 절박해 보인다. 무엇이 그의 뇌신경이 가진 적응능력을 잠식해 갔고, 또 무너지게 한 것일까?

외톨이

여러 보도에서 나온 조승희씨의 모습을 종합해보면, 그는 심지어 초등학교 때부터도 급우나 교사의 눈에 띄지 않고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소년이었다. 지독한 외톨이였고, 항상 말이 없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거나 대답하는 데 20초 정도 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답하고, 실내에서도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하고, 늘 혼자 방에서 지내고, 친구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틀어박혀 게임만 하고, 방에는 책상과 컴퓨터와 책밖에 없었으며, 뭔가 '이상하고 석연찮은' 사람이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또 일부는 그가 고교시절 심각한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거의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 가능한 묘사를 얻는 데는 한계가 많지만, 적어도 그가 매우 오랜 기간 고립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패턴'은 단기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특성이 성격과도 같이 공고할수록, 그 뿌리는 더 어린시절에 있기 마련이다. 추측컨대 그는 오랫동안 또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왔을 것이며, 거기서 벗어나려는 나름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이상하고 석연찮은'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또래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는지, 아니면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개의 고리가 서로 맞물린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쪽이든 그 결과는 유사하다.

실제로 많은 아이가 학교폭력, 그리고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잘난 척해서, 장애가 있어서, 너무 소심하고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해서 또는 너무 공격적이고 또래들을 배려하지 않아서 등 이유는 다양하다. 따돌림을 당하는 피해자는 우울하고 위축되며 자신감과 자존심의 손상, 수치심 그리고 크나큰 무력감을 경험한다. 동시에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마음속에 쌓아 두게 된다. 청소년기가 되어 신체적으로 성숙해지고 자기 주장이 강해지면 그렇게 축적된 분노와 증오는 점점 더 표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따돌림의 희생자들은 어릴 때부터 건강한 또래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적절한 수위와 방법으로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을 잘 배우지 못한다. 그 결과 그런 자신의 감정을 미숙하고 뒤틀린 형태로 표현하거나 자기보다 더 약한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주변의 누구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사회 속에서 고립시킨다. 아마도 조승희씨는 그와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글이나 영화를 보고 그것을 창작한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개인의 창작물은 그 사람의 무의식적ㆍ의식적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나 그것이 작품으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각색 과정을 거치므로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상태를 직접 반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승희씨가 수업시간에 과제로 제출했다는 두 편의 희곡은 그에 대한 작은 단서들을 제공한다. 필자는 그 가운데 하나인 '리처드 맥비프'의 일부를 읽어 보게 되었다. 희곡에는 리처드 맥비프라는 계부, 어머니 수(Sue), 그리고 존(John)이라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 희곡은 그들 셋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증오와 분노의 폭발이 내용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성적으로 모욕하며, 죽이려고 하거나 죽이는 상상을 하거나 실제로 죽이지만 그 안에 스토리의 개연성은 별로 없다. 다시 말해 그가 쓴 글들은 이야기로 변용된 자기 표현이라기보다 날것 그대로의 증오와 분노를 나열해 놓은 것에 가깝다.

희곡의 내용보다 그가 과제로 그런 글을 제출했다는 사실, 즉 그것을 공식적 논평의 대상으로 교수와 급우들 앞에 드러냈다는 행위 자체가 더 인상적이다. 조금 다른 예로, 많은 청소년들이 팬터지 소설을 쓰면서 마음속에 억압된 분노와 환상을 표현하는데, 그 강도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건강한 일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유하고 평가 받는다.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소통하고자 하는 의사표현이다. 소설의 내용으로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타인과 공유되는 것은 그 밑에 흐르는 정서인 것이다.
그가 희곡을 타인들 앞에 내놓았을 때, 그는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뒤틀린 분노가 얼마나 크고 강렬한지 누군가 알아차려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과는 불행하게도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의 분노에 놀라고 겁에 질려 그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만들었지만 말이다.('조씨의 희곡 내용이 너무 끔찍한 나머지 동료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논평해주었으며, 교수조차 조씨에게 최종 논평을 강요하지 않았다'.ㆍ중앙일보, 2007년 4월 17일자) 그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역시 늘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언론에서는 그가 여학생들을 스토킹한 행동 때문에 정신과에 입원한 적이 있다고 보도했지만 누군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지속적으로 치료 시스템과 접촉시켜 주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너 때문에"

사건 초기에 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그의 기숙사 방에서 "너 때문에 이 일을 저지른다"는 메모가 발견된 것이다. 또한 같은 노트에 "부잣집 아이들, 방탕함, 기만적인 허풍쟁이들"을 비난하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비디오에도 역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의 책임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당시에 "너"를 단지 "헤어진 여자친구"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좀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추측은 어느 정도 맞은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린시절에 어떤 아이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가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아오면서 과연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애정을 쏟은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그가 결국 자살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애착이 소멸될 때 사람은 자살에 이른다. 그가 저지른 대량학살은, 그것이 자살이든 더 이상의 학살을 막기 위한 경찰 측의 조치이든, 종국에는 자신이 파괴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질 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행위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마지막 보루',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데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믿음은 삶의 초기 수년간 안정된 양육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그는 삶의 어느 시점에선가, 아마도 아주 초기에 뭔가 손상을 겪었고, 이후에도 그것을 회복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 누군가(아마도 망상세계 속의 박해자)가 자신을 "구석에 몰았다"고, "단 하나의 선택권만을 주었다"고 하는 그의 말은 상당부분 곧이 들리는 구석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2세로서 그의 생활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궁금하다. 그가 겪은 어려움들이 과연 이민 2세로서 완전히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불확실한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까? 그의 경우라면 아마 영향을 꽤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비디오를 통해 들려 오는 그의 영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미국 동부인들에 비하면 어딘가 어눌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아마도 좀더 융통성 있고 사교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아이였다면 적응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든 다소 취약한 아이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의 경우를 보며, 요즘 광풍에 가까운 조기유학 붐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료실을 찾아 오는 아이들 중 많은 경우가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때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가 적응이 어려워서 우울증이나 적응장애를 겪고 있다. 그들의 고민은 다양하다. 언어와 또래 관계 문제로 겪는 어려움은 물론이고 부모와의 소통 단절 또한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적지 않은 경우에 아이의 적성이나 능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부모의 일방적 결정으로 유학을 보내고, 그런 아이들은 혼자 고민거리들을 떠안은 채 위축되어 간다. 더 많은 경우에는 부모 자신의 가치관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남들이 하니까 서둘러 유학을 보낸다.

부모가 함께 유학을 떠나지 못한 경우, 아이들은 일탈행동을 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대상이 된다. 부모 중 한 명이 함께 간 경우에도, 부모는 부모대로 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에 겹고, 아이의 심리적 어려움을 살펴줄 여력이 없다. 살핀다고 해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준비가 미처 되지 못했거나 부모와 자녀 간 건강한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낯선 문화에 무리하게 이식시키려는 노력은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병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종과 문화가 상이한 사회에 통합된다는 것은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조금씩 들려오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면, 끔찍하고 소름이 돋는 와중에 그에 대한 연민이 일어난다. 그가 저지른 것은 과연 "정신병에 걸린 부적응자의 치정과 질투"가 부른 어이없는 사건일 뿐이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포괄적이고 깊은 뿌리를 가진 사건은 아닐까. 파괴와 증오와 분노, 그 밑바닥에 숨죽인 상실과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많은 부모들과 스승들과 친구들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소통의 문제, 가치관의 문제들이 조승희라는 사람 안에 엉켜 있는 것을 본다. 어느 봄날 아침에, 인간 비극의 정점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유희정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Hee Jeong Yoo , MD, Ph.D.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Psychiatry Seoul National University


Creator

Hee Jeong Yoo

Date

2007-10-19

Contributor

Haeyong Chung

Language

ko

Citation

Hee Jeong Yoo, “ì •ì‹ ê³¼ 의사가 분석한 ‘버지니아 비극과 조승희’,” The April 16 Archive, accessed November 23, 2024, https://april16archive.org/index.php/items/show/1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