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교 붙은 눈꺼풀과 옻칠한 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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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교 붙은 눈꺼풀과 옻칠한 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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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게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는 게 올바른 학문의 길이다."

조선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제자인 박제가의 저서 '북학의(北學議)' 서문에 쓴 말이다. "흐트러진 마음(放心)을 다잡는 게 학문의 길"이라는 맹자의 말을 패러디한 것인데 맹자가 학문하는 이의 정신 자세를 강조했다면 연암은 그의 행동거지에 무게를 실었다. 명분과 공론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우선이라는 북학파의 영수가 어찌 아니 그러랴.

지난 한 주를 뜨겁게 달궜던 버지니아공대 참사 사건 보도를 읽으며 생뚱맞게 연암의 말이 떠올라 책장을 다시 펼쳤다. 여기에서 연암은 당대 조선 선비들의 고루한 태도를 호되게 나무란다. 좀 길지만 들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조선 선비들은 세계 한 귀퉁이 구석진 땅에서 편협한 기풍을 지니고 살고 있다. (...) 우물 안 개구리와 잔가지 위 뱁새가 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으스대며 사는 꼴이다. (...)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학문할 줄 모르는 잘못에 있다. (...)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중국을 통치하는 자는 오랑캐다. 그들에게 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나는 부끄럽다.' (...)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좋으면 오랑캐라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며 배워야 하거늘, (...) 우리를 저들과 비교하면 한 치도 나은 점이 없건만 한 줌 상투를 틀고 천하에 자신을 뽐내며 (...) 저들의 언어를 '되놈말'이라 중상하고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좋은 제도까지 싸잡아 배척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차 누구를 모범으로 삼아서 개선할 것인가."

비극을 수습하는 미국인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라보며 연암을 떠올리는 건 그가 이 시대를 살았더라면 참지 않고 터뜨렸을 한마디 포효가 못내 아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슬픔과 분노를 삭이고 상처를 보듬는 미국민의 태도는 정녕 성숙하고 지혜로웠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유가족들조차 놀라우리만큼 침착함을 유지해 주위 사람을 더 아리게 했다. 늑장 대처한 학교 당국과 경찰을 원망하는 멱살잡이나 욕지거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항공기가 몇 시간만 지연돼도 목청을 돋우며 농성을 벌이는 모습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어지간히 낯선 풍경이었다.

한국 국적의 범인에 제발 저려하는 한국을 위로한 건 오히려 미국이었다. 신문 사설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잘못이 아니며 잘못은 이민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미국에 있다"고 자숙했다. "한국의 사과를 신의 은총과 인간애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인다"고 한 신문도 있었다. 희생자들과 함께 범인 조승희의 추모석까지 마련되고 그를 위한 추모 편지와 꽃까지 이어지는 모습은 우리네 '끼리끼리' 문화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한국 국적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을 저질렀을 때 우리도 그들처럼 반응할 수 있을까.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오만한 제국, 미국에는 그런 뽀얀 속살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강한 미국을 만드는 진정한 힘인 줄도 모른다. 그런데 왜 여태껏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우지 못했을까. 오랑캐한테서도 따라야 할 이런 점은 놔두고 왜 코끼리 다리 만지며 친미니 반미니 다투고만 있었을까. 연암이 살던 때처럼 외국행이 힘든 것도 아니고 이웃처럼 드나드는 미국이며, 거기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만 10만 명이라는데 말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각막을 가지고 있어 아무래도 그것을 떼어낼 수 없다. 학문에는 학문의 각막이, 문장에는 문장의 각막이 단단하게 붙여져 있다."

박제가의 '오늘날'이 20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까지 유효하지 않나 싶다. 여전히 우물 안에 앉아서 아교 붙은 눈꺼풀과 옻칠한 각막으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는 것은 아닐까 말이다. 그걸 꾸짖는 연암의 불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이훈범 논설위원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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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Source: Joins.com/ JoonAng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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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or

Hoon Beom Lee

Date

2007-10-22

Contributor

Haeyong Chung

Language

ko

Citation

Hoon Beom Lee, “아교 붙은 눈꺼풀과 옻칠한 각막,” The April 16 Archive, accessed October 20, 2019, http://april16archive.org/items/show/1463.